- 존재의 떨림은 서로의 울림이 된다.
- 인간은 울림이다. 우리는 주변에 존재하는 수많은 떨림에 울림으로 반응한다. 세상을 떠난 친구의 사진은 마음을 울리고, 영화
레미제라블의 ‘민중의 노래’는 심장을 울리고, 멋진 상대는 머릿속의 사이렌을 울린다. 우리는 다른 이의 떨림에 울림으로 답하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나의 울림이 또 다른 떨림이 되어 새로운 울림으로 보답받기를 바란다. 이렇게 인간은 울림이고 떨림이다. ->
이게 과학책 서론이라고?! 당신 정체가 뭐야???
어둠에도 색이 있다.
빛이 거의 도달하지 않는 맞은편 벽의 어둠은 태곳적 신비를 간직한 동굴의 색과 같고, 침대 밑의 어둠은 부족한 빛마저 모두 빼앗겨 블랙홀이나 가질 법한 검은색을 띠며, 내 몸 가까이 착 들러붙은 어둠 아닌 어둠은 몸의 일부가 된 듯 내 자신의 색과 구분이 되지 않는다. 밝은 빛 아래서 빛을 실체로 느낀 적 없으나, 어둠이 충만한 곳에서 어둠은 무거운 실체가 된다. ->
서양인들은 눈에 Namu:"멜라닌" 색소가 부족하다. 그래서 햇살 가득한 곳에서 눈을 지키기위해 썬글라스를 착용했고, 밤에는 작은 불빛 만으로도 충분히...살 만했다. 나같은 Namu:"한국인"은 눈에 멜라닌 색소가 꽉꽉 들어차있어서 밤에 수면등켜고 있으면 갑갑함을 느낀다. 환한 LED..너무 좋아
- 세상은 왜 존재할까?
존재하지 않는 것에는 이유가 필요 없다. 하지만 무엇인가 존재한다면 왜 그것이 있어야 하는지 설명이 필요하다. 300년 전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무언가 있는 것보다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는 존재의 이유를 창조자에서 찾았다. 물론 세상이 무無라고 해도 설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다면 그런 질문을 할 주체, 아니 질문 자체도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우주의 신비를 탐구하는 물리학자라면 세상이 왜 존재하는지 답할 수 있을까? ->
물리학자라서 할 수 있는 멋진 이야기. 과연 나는 어떤 이유를 찾아 방황하고 있는 걸까?
- 인생을 살아가며 지켜야 할 중요한 가치들을 위상수학적 구멍의 개수에 비유할 수도 있다. 구멍의 개수를 유지할 수 있다면 어떤 변형도 받아들이며 자유롭게 살아보는 것은 어떨까? 위상수학적으로는 모두 동등한 삶이다. 삶의 겉모습을 몇 배로 늘리는 것에는 집착하면서 정작 바꿀 수 없는 인생의 가치에 무관심했던 것은 아닐까? 나에게 있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인생의 가치는 무엇일까?
위상수학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
세상의 많고 많은 것 중에서, 나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를 찾아내는 것. 그것이 인생이다. 인생이 망할 것처럼 힘겨운 나날이 이어지더라도, 나만의 가치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 가치가 뭐냐고? ㅎㅎㅎ